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이중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집 앞에 내려준 그는 그대로 내 차를 타고 돌아갔다. 기실 내가 그를 억지로 끌고 온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난 시동을 끄지 않은 차가 그대로 좁은 골목을 도는 것을 지켜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왔다. 저 멀리 엔진 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날은 어두워진 지 오래였으나 그보다 ...
너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나는 며칠 전에 큰 맘 먹고 산 티셔츠를 더럽혀 조금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너는 좁은 길 건너, 굽 낮은 고무창 운동화의 코로 보도블록의 문양을 툭툭 차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침 같은 때에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나를 보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너는, 건널목 너머로 그렇게 말하며 수...
희뿌연 색을 띠고 있는 새벽하늘은 아직 햇빛을 받지 못해 차가웠다. 시야 앞이 파랬다. 나는 불과 몇 초 전 충동적으로 던져버렸던 휴대전화를 툭툭 발로 건드리다가 이내 허리를 숙여 집어들었다. 전원 버튼을 눌러보니, 앞면 유리는 박살이 났지만 제대로 작동했다. 나는 화면을 몇 번 눌러 방금 읽었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앱을 열었다. 이중구에게...
병이 생겼다. 봄과 여름을 지나는 계절의 간극 사이의 일이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예. 괜찮으니까 일 하세요." 그는 이마를 누르던 자신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며 손짓했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이야 하지만, 요즘 통 어지러움이 가시지를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걸까, 젊었을 적에는 며칠 밤을 새면서 업무를 해도 훨훨 날아다녔는데. 그렇게 세...
그는 자신을 닥터라고 칭했다. 타임로드는 긴 시간을 살았다. 아주 긴 시간을. 그는 시간과 공간의 틈새를 비집으며 떠돌아다녔고, 그를 동경하는 자와 숭배하는 자와 저주하는 자와 두려워하는 자들을 모두 만났다. 별들의 바다를 제치고 행성과 달들을 지나서 그가 있었다. 단 하나 남은 타임로드, 시간의 여행자이자 제왕인 닥터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우주의 역...
밥 먹었어요? 아니. 왜요? 바빠서. 언제 마쳐요? 늦는다. 그는 무어라 더 적을까 하던 마음을 접었다. 그냥 늦는 게 아니라, 정말로 늦은 시각이다. 퇴근하고도 남았을 밤이건만 그는 아직도 남은 업무에 발목이 잡혀있다. 장훈이 대충 짧은 답장을 써 던지곤 전화기를 내려놨다. 출세하려고 피 터지게 공부해서 경찰 되고 검사 되고 했건만 인생이 별로 편해진 것...
승상께서는 아직 퇴청하시지 않으셨느냐? 예, 아직…. 그래, 알았다. 사람을 보내 알릴깝쇼? 되었다. 예서 기다리마. 조운은 길게 읍하는 하인을 물린 후,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조용히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 분명 휴식을 취해야 할 공간이건만, 뜻이 무색하게도 정리되지 못한 죽간이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승상의 집무실을, 또 승상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놀라...
나는 그 날 이후 자주 악몽을 꿨다. 꿈 속에서는 모든 게 뒤섞인 채로 나왔다. 나에게 달려드는 남자들도 있었고, 도망치는 나도 있었다. 어떤 때는 잡히기도 했고 어떤 때는 도망치기도 했다. 숨이 막힐 듯 생생한 호텔의 계단은 이상하게 휘어지곤 해서 자주 넘어졌다. 꿈에서 겨우 깨고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헐떡거리는 숨이 잦아들었지만, 그 때마다 내게 든 ...
누군가에게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침대 밑의 괴물이었다. 누구는 그를 잡아죽여야 할 악마로 보았고, 또 누구는 감히 손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는 구원자였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가, 쇳덩이를 타고 내려와 어둠 속에서 추락하는 핏방울들을 눈으로 좇았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셀 수 없는 수가 바닥을 때...
장훈이 퇴원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그의 실적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그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이번 일은 그가 자조적으로 하던 예상과 반대로 착실히 실적으로 카운트된 것 같았다. 십년감수 했네, 이 씨…. 부장검사새끼, 하는건 좃도 없으면서 훈수는 또 오질라게 많이 둬요. 그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감칠...
생각해보자면, 회사 내에서 왕따당하는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을 것이다. 적이 많은 것도 기쁠 수는 없을 것이고, 모두의 눈총을 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하는 드문 인간 구승효는 현재 상국대병원 사장으로 재임 중에 있었고, 말 그대로 사내의 모든 욕이란 욕은 다 처먹고 있었다. 정말로, 모든 욕! 그가 만인의 술자리 위 오징어...
날씨가 후덥지근한게 무덥다 못해 푹푹 쪘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열기가 몇 주고 계속되고는 하는, 흔한 여름이었다. 평소보다 훨 더운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뉴스에서는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몇 년 만의 최고 기온을 갱신했다느니, 일사병이며 열사병으로 몇 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느니 하는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 아스팔트가 후끈 달아오른 서울의 도심 한 ...
글러지만 글러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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